아라한에 도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성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라한 이하를 성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승에서 그들은 아직 에고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성인이 아닙니다. 아라한에 이르면 에고가 파괴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작은 깨달음이라는 의미는 무아의 진리에 깨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자격이 됩니다. 하지만 대승의 관점에서 그들은 깨닫지 않았습니다. 대승에서 깨달음은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부처님과 똑같은 지견이 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과 똑같은 진리를 봅니다. 반면에 아라한은 그럴 수 없습니다. 대승에서 우리는 매우 정확한 용어롤 사용합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성인이고 이승입니다. 그들은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더이상 에고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갈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대승에서 불보살님, 깨달음 존재들은 큰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진공의 경험입니다. 이 진공은 무엇입니까? 소승에서 아라한과 벽지불의 지혜로는 자아의 공을 봅니다. 반면에 진공은 나머지 우주입니다. 공과 진공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공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면 반야바라밀다를 얻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선종에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불성을 봅니다. 진정한 성품에 깨어납니다. 태어나기 전의 본래 면목을 봅니다. 성품을 보면 불도를 증득합니다. 이와 같을 때 깨달은 보살은 걸림이 없습니다. 마음에 전혀 장애가 없습니다. 그는 과보와 장애가 없습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과보는 과거의 잘못의 영향입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 다른 사람의 수행을 질투합니다. 아내를 절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수행할 때가 되면 수행을 잘 하지 못합니다. 수행을 장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보의 장애입니다. 보살은 무언가를 할 때 장애가 있으면 과거 잘못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는 전혀 번뇌롭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짜증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번뇌롭지 않습니다.
업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업장은 일을 수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인내가 없어 여러분은 짜증을 냅니다. 왜 이렇게 어렵지? 성품을 볼 때까지 선을 수행하거나, 깨달을 때까지 염불하면 인내가 매우 많고 업장으로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세번째 장애는 번뇌장입니다. 여러분이 수행에 진지하다면 이 장애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번뇌장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마음의 움직임은 여러분을 괴롭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괴롭습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죠? 고통 위에 고통이 더해집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을 괴롭게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것에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때때로 번뇌를 일으킵니다. 24시간 내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항상 번뇌롭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픕니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너무 배부릅니다. 낮잠을 자야 겠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일어나서 기분이 너무 안 좋아. 부인이 불평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게을러요? 하나의 번뇌 뒤에 다른 번뇌가 뒤따릅니다. 번뇌장의 문제는 번뇌로울 때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만두는 것의 문제는 무엇이죠? 여러분이 그만두면 여러분을 그만두게 만든 그 번뇌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자신의 번뇌의 희생자입니다. 미래에 무엇을 하든 똑같은 번뇌가 일어나면 그만둘 것입니다. 남편과 이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은 다시 결혼하고 전과 똑같은 번뇌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번뇌가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러면 무엇을 합니까? 번뇌가 너무 강합니다. 그 때 해야할 것은 내려놓음입니다. 미래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그만두지 않습니다. 그렇게하면 빨리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두면 번뇌의 희생양이 됩니다.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계속 참습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만두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너무 피곤해서 자연스럼게 잠이 듭니다. 머리는 더욱 맑아집니다. 선택이 없을 때 우리는 극한까지 견딜 수 밖에 없습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면 다른 상태입니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내려놓지만 심리적으로는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선택이 없을 때 내려놓기가 더 쉽습니다. 극한까지 견디도록 훈련시키면 내려놓기가 쉽습니다. 문제를 빨리 해결합니다.
내려놓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스트레스를 선택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스트레스를 선택합니다. 여러분이 내려놓음을 배우지 않는 한 그것은 거기 있을 것입니다. 세세생생 거기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견딜 수 없는 이유는 스스로 자초한 것입니다. 누구 탓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참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번뇌를 선택했기 때문에 참을 수 없는 이유를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아픈 이유를 보지 못합니다.
왜 그렇게 참을 수 없습니까?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다른 사람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스스로 말합니다. 누군가가 문제를 만들었어. 이건 나의 잘못이 아니야. 스스로가 참을 수 없다고 결정합니다. 당신이 참을 수 없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을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참을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참을 수 없거나 참을 수 있음을 결정합니다. 다른 누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정하는 자는 당신입니다. 오직 당신입니다. 다른 사람 탓을 그만하세요. 참기 힘들 때 여러분은 그 상황에서 도망갈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에게 왜 그것을 참기 힘들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탓합니다. 다른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括는 방해입니다. 장애를 받습니다. 礙는 걸림을 의미합니다. 걸렸습니다.
자재력이 없기 때문에 장애를 받습니다. 성문은 법에 대한 집착으로 걸림이 있습니다. 보살은 무지의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이 수행의 지혜를 여는 열쇠입니다. 족쇄를 여는 열쇠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로막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다른 사람 탓을 합니다. 그들이 그만두기로 선택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그만두라고 합니다.
성문은 공을 증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공을 봅니다. 공하기 때문에 내가 하건 하지 않건 여전히 공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의미가 뭐지? 그것을 공의 법집입니다. 공에 집착합니다. 공을 포함해서 많은 것에 집착합니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하거나 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같습니다 .모두 공합니다.
보살은 깨달아도 여전히 무지의 장애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원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여전히 볼 수 없습니다. 무지가 위험한 이유는 자신만의 무지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리하고 교육을 받아도 자신의 무지를 볼 수 없습니다. 대승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선지식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침을 따릅니다. 지침을 따르지 않는 한 자신의 무지를 볼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너의 무지를 보아라. 여기에 서서 보면 볼 수 있다. 하지만 여러분은 말합니다. 아니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일이 보살에게 일어납니다. 그에게 지침을 주면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알아요? 당신은 누구죠?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인가를 받았어요. 나는 조사에요. 당신이 무엇을 아나요? 깨달음의 각각의 단계에서 저마다의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볼 수 없습니다. 틀렸습니다. 여러분이 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무지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그들에게 지름길을 알려줍니다.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은 선지식의 지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핵심은 장애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걸림이 없기 때문에 이 보살은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끝냅니다. 여러분의 수명은 시간이 제한되었습니다. 몸이 있는 모든 사람은 분단 생사입니다. 변역생사는 그들은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신체적 수명의 한계를 끝냈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만큼 오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변역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변역은 끝없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모든 미세한 정신적 생각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보살은 분단생사와 변역생사를 끝냈습니다.
본래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 하나만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오직 여러분의 상상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다시 하나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불성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신기루, 모든 거짓, 모든 꿈이 사라지고 불성으로 돌아갑니다.
걸림이 없다는 뜻은 어떤 것도 여러분을 장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없으면 어떤 것도 장애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견딜 수 없다면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내려놓으면 더이상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욕망을 내려놓으면 더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욕망을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합니다. 욕망을 내려놓는 법을 알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그러면 불성으로 돌아가고 여러분은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