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무생, 무행 03) Four-Fold Four Truths - The Heart Sutra - 20140921

XW 2023. 7. 20. 01:56

반야심경은 짧지만 매우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어 불자뿐만 아니라 비불자에게도 잘 알려진 불교경전입니다. 경전에 대한 개요를 살펴보기 위해 우리는 천태오중현의를 통해 경을 분석합니다. 

 

천태종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교의 가르침은 4가지 종류로 분류합니다. 첫번째 종류의 가르침은 장교입니다. 이것은 소승의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생이 있으면 멸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함의 진리입니다. 아함의 가르침은 광범위하게 진실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것은 인간계에서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시기 전에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멸의 진실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들은 인간 조건의 생멸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두번째 진실은 무생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무생의 진실은 모든 법은 환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변형된 것이지 실제의 체는 공합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법은 환영이고 변형된 것입니다. 체는 공합니다. 모든 법은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도 환영입니다. 여러분의 다리 통증도 환영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 의미는 여러분이 보는 것은 거기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화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화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은 거기 전에 없었습니다. 실제 체는 공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꿰뚫으면 진정 이해하면 고통이 고통이 아님을 볼 것입니다. 

 

집도 없고 멸도 없습니다. 도도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얼마 전에 말했습니다. 장교는 매우 경이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끔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 지식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것이 진실이야. 그들은 그 진실을 움켜쥡니다. 그것은 단지 말입니다. 지식에 집착하다니 무슨 문제입니까? 어떤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공합니다. 모든 문이 공합니다. 공에 집착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것에 전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멸이라는 새로운 진실을 발견했을 때 작은 지식을 움켜쥡니다. 여러분은 작은 지식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나는 이것을 절에 온 많은 사람들에게서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서 한 사람이 중국에 가서 중국 절에서 수행했습니다. 그가 여기 와서 말했습니다. 나는 법구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여기 법구는 옳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여기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어떻게 중국인들이 하는지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매우 자랑스럽게 중국인들이 하는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도 그런 식으로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법구를 치는 잘못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작은 지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조금 알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르친 방식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가게끔 합니다. 나는 때가 되었을 때 그들을 부드럽게 천천히 고쳐나갑니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적게 알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이를 좁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모든 불교의 가르침은 여러분이 점차적으로 변화하게끔 돕는 것입니다. 진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여러분의 현재 지식을 놓아버립니다. 여러분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세계가 오직 이와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이 있습니다. 

 

마음은 무한합니다. 그것은 팽창합니다. 어떻게 지식을 무한이 되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무한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전에 아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는 순간 내려놓습니다. 그 지식을 움켜쥐지 않습니다. 알지만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의미는 알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지식이 여러분을 통해 흐릅니다. 그것은 오고 갑니다. 여러분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에 집착하지만 인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모든 전쟁, 모든 고통이 지식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보다 더 옳아. 그래서 내 뜻을 당신에게 강요해도 괜찮아. 나는 이것이 당신에게 더 좋다고 믿어. 이는 인류의 병입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인지되지 못하는 가장 심각한 병입니다. 우리는 가난과 전쟁을 하고 암과 전쟁을 합니다. 가장 심각한 범죄는 작은 지식입니다.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에게 생멸의 네가지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해탈한 후에도 거기에 도달하게끔 도와준 그 지식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통교라는 더 나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이것이 아라한과 소승 사람들의 병입니다. 그들은 법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해탈하게 도와준 지식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나는 작은 지식이라고 합니다. 고성제. 고통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집성제. 고통은 쌓입니다. 층 위에 다른 층이 쌓입니다. 하나의 층을 제거하자마자 더 많은 고통이 밑에 있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세번째는 멸성제. 고통이 멸합니다. 마지막은 그곳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생멸에 대한 이 네가지 진리를 가르친 때가 장교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들은 윤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아라한에 도달하면 무학이라고 합니다. 더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몇명의 아라한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계획이 어떻게 되죠?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더이상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무학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안다고 느낍니다. 더 배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입니다. 부처님은 그들보다 훨씬 지혜롭고 뛰어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부처님과 연결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스승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너무 만족합니다. 그들은 너무 빨리 만족합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통교입니다. 부처님은 말합니다. 고통이 없다. 고통은 실제가 아니다. 고통에 가르친 지식은 실제가 아니다. 실제 고통이 전혀 없다. 집에 대해 가르친 것은 집이 아니다. 멸에 대해 가르친 것은 멸이 아니다. 도에 대해 가르친 것은 도가 아니다. 이는 무슨 의미입니까? 도는 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도가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이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이해하는 생각하는 식의 고통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그 지식을 내려놓으세요.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왜 아라한은 작은 지식을 내려놓아야 합니까?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진전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소승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첫번째 중요한 단계는 법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출세간적인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출세간적인 지혜마저도 붙잡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식을 내려놓습니까?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전체의 진실이 아니다. 그것에 확신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믿지 마세요. 자신을 중요하다고 여기지 마세요. 자신을 너무 믿지 마세요. 이것이 수행하는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불교에서 최고의 존재는 없습니다. 창조자도 없습니다. 구원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을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여러분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명상할 때 내려놓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명상할 때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대해 팁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수행하는지 비밀을 알려줍니다. 어떤 법상을 보든지 내려놓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능할 때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명상할 때 이 지식을 내려놓으세요. 

 

아라한에 도달하면 이 공에 대한 지식을 없애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매우 어렵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예는 무엇입니까? 소승의 가르침에는 준비가 없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들은 여러분에게 더이상 의견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습니다. 아라한 전에는 묻습니다. 하지만 아라한에 이르면 그들은 더이상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아라한들은 거기 도달하고 신통력을 갖추고 그것에 빠집니다. 그들의 지식에 매혹됩니다. 그들의 힘에 매혹됩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강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위급함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많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진전하는 대신 돌아다니면서 자랑을 합니다. 나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어. 돌아다니면서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합니다. 더 높은 목표를 위해 연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라한도 업보를 겪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생사를 끝냈지만 업보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마지막 네번째 가르침은 무행의 가르침입니다. 배가 고플 때 어떤 것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종의 초조에게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스승이 그를 절에서 쫓아내고 다른 산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돈도 쌀도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근처 마을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불교를 가르친다고 하고 무엇을 합니까? 마을에 가서 절을 짓고 마을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와서 절을 지원합니다. 상호 이로운 관계입니다. 첫 단계는 그들이 마을 사람을 돕고 마을 사람은 그들을 돕습니다. 이는 의존입니다. 반면에 궁극적 진리는 의존관계가 없습니다. 무행입니다. 쌀이 없으면 먹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쓰지 않습니다. 옷이 없으면 입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행입니다. 이것은 보살보다 높습니다. 이것은 보살보다 높은 법입니다. 이는 보살승의 마지막 법문입니다. 위산에 가서 과일을 따러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물을 마시러 강에 가지 않았습니다. 원숭이들이 먹을 것을 공양했고 그는 굶주리지 않았습니다. 무행은 무슨 의미입까? 모든 법은 실제로 실상임을 이해합니다. 고통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집을 끊을 필요도 없습니다. 수행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증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굶주려도 우리는 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행입니다. 반야심경은 무행의 법입니다. 무행은 무엇입니까? 

 

첫번째 진리에서 행에 기반합니다. 의지를 사용합니다. 생각을 일으킵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은 생각을 일으킵니다. 보살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일으키면 업을 짓습니다. 의지를 사용하는 한 업을 짓습니다. 죽음을 봅니다. 죽음의 귀신이 다가옵니다. 아라한은 나가라고 합니다. 귀신은 바로 거기서 멈춥니다. 이에 비해서 보살은 죽이려고 죽여. 그저 일어나게 합니다. 그는 힘을 아낍니다. 업을 짓지 않습니다. 업을 짓지 않는데에 지혜가 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업을 짓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킵니다. 그를 돕자. 이것은 업을 짓습니까? 업을 짓습니다. 그는 관여를 합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에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돕지만 생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어떤 업을 짓지 않습니다. 업을 짓지 않고 돕기 위해서는 더이상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라한은 사람들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불보살님은 말합니다. 나의 일은 돕는 것인다. 나는 더이상 돕는 다고 보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숨을 쉴 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없이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돕는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불보살님은 그저 돕습니다. 그저 할 뿐입니다. 그저 하루종일 사람을 돕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