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무득, 장애의 근절 02) Tian Tai Meanings - The Heart Sutra - 20140914

XW 2023. 7. 18. 02:19

이 경은 진공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진공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지식입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지식입니다. 모든 불교의 지식, 모든 불교의 가르침, 명상, 염불, 진언 수행, 모든 경, 모든 수행, 계율, 이 모든 것들이 한가지 공통적인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진공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불교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입니다. 모든 것이 이 곳으로 이끕니다. 

 

어떤 스승에게서 배우든지간에 어떤 종파에 소속되어 있는지간에 여러분의 수행은 여러분이 진공을 증득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내가 처음 시작할 때 거의 소승의 스님을 따를 뻔 했습니다. 나는 절에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예전에 가본 절이었고  다시 찾아와서 스님이 나를 가르쳐주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스님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다른 절을 갔습니다. 그 절에서 나는 선화상인을 만났고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인생의 중요 전환점이 순전히 운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나의 목적은 훨씬 낮았습니다. 나는 진공의 개념에 대해 결코 가깝지 않았습니다. 소승의 사람들은 진공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대승의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공의 증득입니다. 진공은 부처님에 의해 처음 제시된 개념입니다.  

 

법계의 모든 부처님이 같은 진공을 가르칩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진공의 개념을 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는 진공을 증득하기를 원해.”라고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부처님의 지식입니다. 이보다 더 높은 지혜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산의 정상에 도달합니다. 다른 것들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 의식에서 우리는 자주 반야심경을 독송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진공을 이해하는 씨앗을 심기 위해서입니다. 

 

진공은 상이 없지만 상이 없지 않는 것도 없습닌다. 이것이 진공입니다. 이것을 외우세요. 이것을 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어떤 단계에 도달하면 언젠가 “아, 이것이구나.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하고 그것을 정확히 봅니다. 

 

진공은 무상입니다. 전혀 상이 없습니다. 무상은 무엇입니까? 무상은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만질 수도 없습니다.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을 볼 수도 없습니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상상에서만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상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진공입니다. 혹은 묘유하고 합니다. 진공과 묘유는 같습니다. 

 

진공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묘유는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부처님의 지식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앞면은 진공이라고 합니다. 뒷면은 묘유입니다. 그것이 불성입니다. 놀랍고 경이로운 경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의 모든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 아직도 구하고 있습니까? 왜 여전히 탐합니까? 여러분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태오중현의 중에서 세번째 종은 무득입니다. 진정 이해한다면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얻어야 할 불도가 없습니다. 이것은 소승의 가르침과 반대됩니다. 

 

그들은 아라한 혹은 불도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얻습니다. 여전히 얻을 것이 있음을 보면 그것은 궁극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얻어야 하는 아라한과를 봅니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면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내려놓습니다. 우리는 나아가라고 합니다. 매달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얻을 것이 없는 것의 특징입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라한 이것들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자마자 내려놓습니다. 그것이 얻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인 얻을 것이 없음으로 가게 됩니다. 소승에서는 그것들에 매달립니다. 그들은 이것은 매우 놀라워. 이것은 매우 중요해라고 합니다. 

 

젠 센터의 젠 스승들은 대부분 재가자입니다. 젠을 이해하면 머리를 기르지 말아야 합니다. 젠은 무집착인데 그들은 아직도 머리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젠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 재가자들은 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내가 압니까? 젠과 선을 이해하는 몇명의 재가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들은 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젠을 이해하는 재가자들은 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젠을 가르칩니다. 다른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저 나의 좁은 소견입니다. 

 

불교의 오종을 이해하는 재가자들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은 재가자에 의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선언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비구니 스님도 포함되나요? 법은 비구 스님이 전수하는데 비구니 스님도 포함되나요? 비구니 스님도 가르쳐도 됩니다. 증거가 있습니다. 부처님 제자 중에 케마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사리불이 비구 중에서 지혜가 제일이라면

케마는 비구니 중 지혜가 제일이라고 부처님께서 말하였습니다. 케마는 절 주위를 다니면서 설법하였습니다. 케마는 사리불처럼 재변이 있었습니다. 사리불이 설법할 때마다 사람들은 환희롭게 들었습니다. 모두가 사리불의 법문을 즐겼습니다. 똑같습니다. 케마가 법을 설하면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파세나디 왕이 그곳을 들렸습니다. 왕은 왕비의 영향으로 법문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그는 여행을 갔는데 말했습니다. “법을 들어야겠다. 부처님은 매우 멀리 계신데 나에게 법사를 찾아와달라.”

그의 관료가 찾으러 왔습니다. 어떤 이름이 떠올랐나요? 케마가 마침 근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법을 가르쳐 달라고 케마 비구니를 초청했습니다. 케마가 와서 법을 설했습니다. 그는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매우 영리합니다. 그는 부처님, 사리불, 목건련 등 부처님의 위대한 제자에게서 법을 들었습니다. 그는 법에 능통합니다. 그래서 그는 케마에게 매우 어려운 질문을 물었습니다. 그의 질문 하나는 예를 들어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그는 여전히 존재하는가와 같은 것입니다.  그녀는 부처님은 결코 이것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왕은 매우 영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대답을 못하는 것은 법의 전수는 비구에 의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이야. 이해를 하지 못해서 대답할 수 없는 것이야. 그래서 그가 무엇을 했나요? 그는 돌아와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부처님은 케마가 한 대답과 똑같은 답을 했습니다. 하나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비구니도 설법이 허용됨을 증명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케마와 같이 출세간적인 지혜가 있으면 법을 설해야 합니다. 아라한이나 이상을 증득하면 성별에 관계없이 법을 설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라한이나 그 이상을 증득하면 더이상 남성도 여성도 아닙니다. 남자 혹은 여잔의 몸을 가질지라도 지혜의 체는 더이상 신체적 몸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더이상 여러분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라한 혹은 그 이상이면 더이상 성별이 없습니다. 그 이하이면 여전히 나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는 것에는 성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의 전수는 비구에 의한다라고 했을 때 이는 더이상 성별이 없는 특별한 계층의 비구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비구니도 포함됩니다. 

 

깨달으면 더이상 성별이 없습니다.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출세간적 지혜가 없다면 아직 법을 설하려고 하지 마세요. 너무 이릅니다. 첫번째 그룹은 깨달은 비구, 비구니를 포함합니다. 다음 그룹은 깨닫지 않은 비구, 비구니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법을 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이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설법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정직해야 합니다.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는 보았습니다. 이것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라고 합니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해했다고 주장하면 큰 곤경에 처합니다. 그래서 두번째 그룹의 비구니의 경우 나라면 비구에게 넘기겠습니다. 비구 스님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나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설법해야 하면 설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녀를 구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법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시방상주의 뜻은 무엇입니까? 온 우주의 깨달은 승가라는 뜻입니다. 소승과 같은 좁은 의미가 아닙니다. 대승에서 승가는 온 우주의 전체 스님, 모든 성인을 의미합니다. 일반 스님들은 오직 이런 성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래서 절에 공양 올릴 때 우리는 그것을 개인에게 주는 공양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존재를 대표해서 받습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복은 무한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복은 훨씬 적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복도 또한 매우 적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과 소승을 비교했을 때 대승 수행으로 얻는 복이 더 큽니다. 여기서 승가는 진정한 스님입니다. 

 

왜 수고롭게 명상을 합니까? 나는 이미 얻을 것이 없는데 명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대답합니까? 얻을 것이 없는데 왜 수고롭게 수행을 합니까?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할 것도 없다. 이것은 왜 오류입니까? 그것은 미혹한 상태입니다.

 

공에 대해서 더 읽으면 공에 대해서 더 미혹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정말 본다면 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까? 그것을 정말 알고 공을 본다면 설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조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으면 공이라고 할 것 조차 없습니다. 왜 굳이 설명하려고 합니까? 이해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공을 이해합니까? 무엇을 해야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는 방법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불교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것을 경험하게끔 돕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어떻게 거기게 도달하는지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도사라고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거기에 이르는 법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거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불교의 좋은 스승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보여줍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칩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여러분이 진공과 무득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입니다.  

 

이 베트남 남자분은 마의 경계에 들었습니다. 그는 매우 확신합니다. 아무도 그를 더이상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공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결가부좌할 필요도 없습니다. 더이상 명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정토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혼돈입니다. 

 

나의 스승은 깨달은 후에 매우 단계가 높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매일 명상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결가부좌로 앉았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2시간 결가부좌로 명상했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존재들의 일과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너무 뛰어나서 더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젠 스승들은 그렇게 상태가 나쁘지 않지만 그들은 미혹합니다. 왜냐하면 개념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 그것을 증득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태오중현의의 네번째는 용입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우리는 장애를 근절합니다. 우리는 왕생위전에서 반야심경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왕생의 장애를 근절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장애입니까? 세 가지 주요한 장애가 있습니다. 보장, 업장, 번뇌장입니다. 보장은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잘못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방해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돌아와서 여러분을 방해합니다. 이제 되갚습니다. 사람들을 방해했고 그들이 돌아와서 방해합니다. 이 장애를 없애는 방법이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경에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두렵지 않다는 의미는 보장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보장이 있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업장에서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세번째는 번뇌장입니다. 번뇌가 있는 이유는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뇌에서 벗어날 때 전도몽상에서 벗어납니다. 

 

이 경의 용은 이런 장애를 근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가 있을 때 이런 장애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장애를 근절하는 것에 대한 일화입니다. 오래 전에 불교 수행자 의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한 미혼 베트남 여성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감정적 애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습니다. 출가를 결심하자 미국인 동료가 그녀에게 구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그에게 그녀의 결심을 알렸고 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구애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이만큼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어. 그래서 그녀는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이 남자의 사랑을 택해야 하나 아니면 부처님께 가야 하나. 어려운 결정입니다. 남자친구와 부처님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녀는 결정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매일 반야심경을 독송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몇달간 그렇게 하였고 출가하였습니다. 이것이 장애를 근절한 예입니다. 그것을 듣는 것조차도 장애를 근절합니다. 우리는 이제 곧 회향을 합니다. 왜 그것이 중요합니까? 이 사람들의 왕생의 장애를 근절하기 때문입니다. 

 

5가지 가르침의 시기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화엄시입니다. 그것은 보살들을 위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보살들만이 부처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화엄경을 설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가서 듣고자 합니다. 왜나햐면 대개 이들은 꺠달았기 때문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선화상인이 처음으로 화엄경을 설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전체 화엄경을 설했습니다. 우리는 전체 강의 세트가 있습니다. 저는 DRBA에 있을 때 그것을 듣곤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중국인이 통역을 해주었는데 그 경험은 가장 희유한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매우 즐거웠습니다. 매일 우리는 그 시간을 고대했습니다.  그 시간이 내 사미 시절에서 최고였습니다. 선화 상인은 매일 하루에 1회이상 설법해서 15년이 걸렸습니다. 하루에 6,8시간씩 법문했습니다. 

부처님은 처음에 21일간 화엄경을 설했습니다.

 

두번째 시기에 부처님은 인간을 가르쳤습니다. 12년간 아함경을 설했습니다. 아함은 수승한 법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비불교의 법을 넘어섭니다. 초기의 많은 제자들은 외도였습니다. 그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부처님은 아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불교로 개종시키고 아라한과를 얻게 도왔습니다. 그들은 불법이 훨씬 수승함을 알았습니다. 

 

세번째는 금강부입니다. 8년입니다. 아함은 아라한과, 벽지불과입니다. 이보다 더 많은 것이 있습니다. 아라한과 벽지불을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것이 금강반야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5번째는 법화열반시기입니다. 법화경과 열반경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는 어떻게 부처가 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깨달음도 좋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은 불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