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진공, 반야, 선지식 4)금강경 2011.10.01

XW 2023. 6. 30. 01:39

반야는 출세간적인 지혜입니다. 우리가 출세간적인 지혜를 개발하기 위해서 씨앗을 심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지혜는 모든 우리의 고통을 끝나게 합니다. 

 

문자 반야는 진공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진공을 들음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씨앗을 이미 심습니다. 진공은 무엇입니까? 진공에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공을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처님을 포함해서 아무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공은 경험해야 합니다. 진공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공을 보면 여러분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면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부처님은 진공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결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공을 이해하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진공에는 아무것도 없고 진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공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변히 그것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에 안주하지 마세요. 결국 여러분은 그것을 증득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더 빨리 그것을 체험할수록 더 행복해집니다. 더 진실하게 됩니다. 이것은 공허한 약속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수행의 과정에서 초선에 도달하면 여러분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과 안락을 경험합니다. 

 

진공에는 묘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불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입니다. 오직 불보살만이 이해합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실제로 거기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삼매가 높아질수록 공에 더 가까이 갑니다. 여러분은 더욱 더 해탈하고 고통은 줄어듭니다. 수행은 나이드는 과정에 역행합니다. 나이드는 속도를 느리게 합니다. 진전을 할수록 덜 경직되고 더욱 유연해지고 요구가 줄어듭니다. 그것이 올바른 방향입니다. 수행이 진전할수록 자아가 작아집니다. 그리고 결국 사라집니다. 

 

불교에서 지혜는 매우 특별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지혜가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소리를 쳤는데 되받아 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관조반야는 자신이 공함을 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를 볼 수 있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에 도달하면 관조반야라는 것을 지닙니다. 자신을 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통증을 겪지만 그것을 관하면 통증을 겪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통증은 바로 사라집니다. 누구도 통증을 겪는 자가 없습니다. 그전에는 미혹합니다. 그전에는 통증을 겪는 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혜는 누구도 통증을 겪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통증은 사라집니다. 지금 당장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야 지혜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삼매에 들면 더이상 느낌이 없습니다. 추위와 배고픔, 즐거운 느낌, 즐겁지 않은 느낌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끊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그들이 삼매에 있을 때에만 그렇습니다. 그들은 삼매에 들고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잘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의 시작입니다. 이러한 수행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매우 위험합니다. 그들은 관조반야를 여는 것을 서둘러서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수행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진전과 똑같이 중요한 것은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그 정도만 얻습니다. 관조반야는 경이로운 지혜입니다. 그것은 경이로운 상태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가고자 서두릅니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경계임을 잊습니다. 그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관조반야를 연 후에 여러분은 법집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관조반야라고 하는 법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이 경이로움에 집착합니다. 예를 드어 삼선에 도달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분 좋은 상태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대단해, 기분좋아라고 하고 거기에 매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더이상 괴롭지 않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경지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괴롭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거기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집착입니다. 그들은 자아는 공하지만 그들이 공하게 만들어준 법은 지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미묘한 집착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선지식 사이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맞다고 봅니다. 선지식이 여러분에게 말을 하면 자신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선지식과 동의하지 않더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밀교의 필수 조건입니다. 선지식의 지시에 반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미세해서 그들은 스스로 볼 수 없습니다. 선지식은 그것을 보고 말해주려고 하지만 여러분은 선지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무지의 위험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리한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영리할수록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확신합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함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선지식은 이것이 공하다고 합니다. 그는 어떻게 거기에 가는지 알려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말합니다. 아니요. 이것은 진짜에요. 왜 이것을 없애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나요? 여러분은 자신의 지식을 자랑스러워합니다. 더 단계가 높을수록 본인이 맞다는 믿음이 더욱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앗을 심습니다. 나는 선지식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지식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복이 필요합니까? 선지식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첫째 여러분은 완전히 스승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승이 여러분을 도와주기를 바라고 최고의 것을 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는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스승은 진정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게끔 도와줍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얻게끔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을 믿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데 갑자기 이사람은 당신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첫째 어려움입니다. 

 

두번째는 무엇입니까? 그는 여러분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하게 합니다. 싫어요. 이건 저에게 맞는 일이 아니에요. 그것이 두번째 어려움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이 여러분을 위한다는 것을 믿어도 저는 이것을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두번째 어려움으로 그만둡니다. 두번째 종류의 복은 그만두지 않는 복입니다. 이런 두가지 복이 있으면 여러분은 해냅니다. 

 

이런 종류의 복은 어떻게 심습니까? 선화상인이 나에게 가르쳐준 첫번째 교훈은 선지식을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나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합니다. 오늘까지도 나는 여전히 선지식을 찾으려고 합니다.    

 

두번째 내가 배운 교훈은 많은 실패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괴로움, 절망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만두면 끝입니다. 모든 복이 사라집니다.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복이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막다른 길이어도 그만두지 않으면 복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어도 그만두지 않습니다. 스스로에게 그만두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