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진공 묘유 09/14/14 - 천태 오중현의
진공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지식입니다. 이것은 모든 수행자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지식입니다. 모든 불교의 지식, 모든 불교의 가르침, 명상, 염불, 진언 수행, 모든 경, 모든 수행, 계율, 이 모든 것들이 한가지 공통적인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진공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인 불교의 지식입니다. 이것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입니다. 모든 것이 이 곳으로 이끕니다. 어떤 스승에게서 배우든지간에 어떤 종파에 소속되어 있는지간에 여러분의 수행은 여러분이 진공을 증득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저는 운이 매우 좋았습니다. 제가 처음 시작했을 때 소승 스님, 베트남 스님에게 거의 갔습니다. 재밌는 것은 거기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절에 스님이 출타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아는 다른 절에 갔습니다. 거기서 선화 상인의 제자를 만났습니다. 그렇게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순전히 운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복과 관련있습니다. 베트남 스님을 만났더라면 진공의 개념을 결코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소승은 진공을 목표로 두지 않습니다. 대승에서만이 궁극적인 목표가 진공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진공은 부처님에 의해 처음 설해진 개념입니다. 법계의 모든 부처님이 같은 것을 가르칩니다. 먼저 진공의 개념을 외우는 것에서 시작하세요.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내는 진공을 증득하기를 원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부처님의 지식입니다. 이것보다 더 높은 지혜는 없습니다.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얻으면 다른 것은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진공은 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진공입니다. 이것을 외우고 기억하세요. 이것을 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점에 어떤 단계에 도달하면 아 바로 이거구나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확히 그것을 봅니다. 이를 증득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진공은 상이 없습니다. 전혀 상이 없습니다. 상이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상이 없다는 것은 전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없고 저도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볼 수 없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을 믿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나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상상 속에서만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상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진공입니다. 혹은 묘유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진공과 묘유는 같습니다. 진공은 안에 아무 것도 없고 묘유는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한쪽은 진공이라고 하고 다른 쪽은 묘유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불성입니다. 이것은 묘한 경계입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그것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는 우주의 모든 부를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 여전히 구하나요? 왜 여전히 욕심을 부리나요?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캐내서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더 이상 다른 곳에서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태 오중현의의 세 번째는 종(宗)입니다. 종은 얻을 것이 없음입니다. 진정 이해한다면 얻을 것이 없음을 볼 것입니다. 얻을 불도도 없습니다. 이것은 소승의 가르침과 대비됩니다. 그들은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들은 아라한과나 벽지불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여전히 얻을 바가 있습니다. 여전히 얻을 것이 있음을 본다면, 이것은 궁극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반면에 대승에서 우리는 아라한과를 얻지만 거기에 도달하면 우리는 내려놓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매달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얻을 것이 없음의 특징입니다. 수다원, 사다함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으면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궁극적인 얻을 것이 없음에 이를 것입니다. 하지만 소승불교에서는 그것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면 왜 명상을 합니까? 이미 얻을 것이 없는데 왜 굳이 수행을 해야 합니까? 이는 미혹한 견해입니다. 선화상인은 높은 수준의 깨달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여전히 결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자기 전에 2시간 결가부좌로 앉았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존재들의 일과입니다.
공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은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공을 보았다면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얻을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공하다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공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공을 이해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공을 어떻게 체험하는지 보여줄 뿐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좋은 스승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것이 유일하게 여러분이 진공과 얻을 것이 없음의 개념을 이해하도록 돕는 길입니다.
천태 오중현의의 네 번째는 용입니다. 반야심경을 독송할 때마다 장애가 소멸됩니다. 왕생위전에서 우리는 반야심경을 독송합니다. 왜냐하면 왕생의 장애를 소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류의 장애입니까? 보장, 업장, 번뇌장입니다.
다섯 번째 교는 반야입니다.